[엘레멘트컴퍼니] 브랜딩과 '보이지 않는 심장', 애덤스미스를 통해 본 브랜드의 역할
- lmnt

- 9월 13일
- 2분 분량
오래된 논문을 꺼내읽는다. 정재식 교수의 <애덤 스미스의 예외의 경제신학: “공정한 관찰자”와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적 계보학 읽기>라는 논문이다. 간략한 요약과 이러한 관점이 브랜딩을 하는 우리에게 어떤 인사이트를 주는지 단상을 공유한다.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 일은 늘 단순한 경제학의 차원을 넘어선다. 이 글은 정재식 교수의 「애덤 스미스의 예외의 경제신학」 을 바탕으로, ‘공정한 관찰자’와 ‘보이지 않는 손’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의 심급으로 변질되었는지, 또 다른 길은 없는지를 따라가 본다.
자유주의 시장의 아버지? vs. 윤리적 사상가
스미스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를 자기조정 시장의 옹호자로 규정한다. 옹호자들은 그의 『도덕 감정론』을 꺼내 들며 그가 사실은 윤리적 사상가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양극단은 모두 피상적이다. 스미스의 핵심은 윤리와 경제, 신학이 묘하게 얽혀 있다는 데 있다.
그의 ‘공정한 관찰자’는 감정 교류의 균형을 잡아주는 장치다. 개인 안에 있지만 동시에 바깥의 초월적 위치를 점하는 이 심급은 칸트의 정언명령이나 프로이트의 초자아와 연결된다. ‘보이지 않는 손’은 개인의 이익 추구가 의도치 않게 공익으로 이어진다는 비유지만, 스미스 자신도 이를 엄밀히 논증하지 못한 채 신학적 은유로 남겨 두었다. 이 허술한 은유가 훗날 시장의 완벽함을 보증하는 마법처럼 오용되었다. 정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보이지 않는 손’은 ‘경제와 신학의 도착적 형식을 보여주는 신자유주의적 초자아의 기원’으로 변질됨 셈이다.
라캉과 지젝이 말한 초자아는 단순한 억압 장치가 아니다. 그들은 초자아를 “즐겨라!”라는 명령으로 해석했다고 한다. 즉, 단순히 금지하는 대신 오히려 욕망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주체를 길들이는 힘이다. “너는 자유다. 무엇이든 해도 된다.”라는 메시지 뒤에는 “그러나 결국 체제를 위반하지 않는 범위에서만”이라는 조건이 숨어 있다. 지젝이 말하는 외설적 초자아는 바로 이 지점이다. 겉으로는 긍정을 가장하면서, 실제로는 죄책감을 통해 주체를 체제 안으로 되돌려 놓는다. 신자유주의가 “자본의 자유를 즐겨라!”라고 말할 때, 이 구조가 그대로 작동한다. 시장은 완벽하다고 속삭이며, 주체의 고유한 욕망을 희생하도록 강요한다.
여기서 슈미트와 데리다의 사유가 갈린다. 슈미트는 주권자를 예외 상황에서 법을 중지할 수 있는 자로 정의했다. 법질서의 바깥에 있으면서 동시에 법을 규정하는 힘. 이 틈에서 권력은 신적 권능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구조는 자본의 독재적 위치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기 쉽다. 실제로 슈미트의 정치신학은 독재권력을 옹호하는 이론으로 악용되기 쉽다.
데리다는 이 틀을 해체한다. 그에게 예외란 순수하고 완전한 초월적 공간이 아니라, 이미 타자의 침투로 오염된 불가능성이다. 즉, 예외는 닫힌 완전함이 아니라 열린 균열이다. 이 균열은 체제 내부의 자기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 타자의 도래에 자리를 내어 준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을 완벽하게 보증하는 신비한 힘이 아니라, 결핍과 모순을 드러내는 틈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 교수는 이 지점을 ‘보이지 않는 손’에서 ‘보이지 않는 심장’으로의 전환으로 표현한다. 손이 만능 해결사를 의미하는 은유였다면, 심장은 고통과 모순 속에서 뛰는 살아 있는 기관이다. 심장은 시장의 결핍을 은폐하는 대신 드러내며, 공동체가 함께 감당할 수 있게 만든다.
브랜드는 심장이 되어야 한다. 공동체의 틈과 모순을 함께 드러내고, 결핍을 은폐하지 않는 것. 그래야만 브랜드는 상처와 균열 속에서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심장이 되어 공동체와 함께 뛰어야 한다.
오늘의 브랜딩에 적용해 보자. 많은 브랜드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손’처럼 군림하려 한다. 완벽을 보증하는 서사, 결핍을 은폐하는 메시지. 하지만 이런 전략은 결국 신자유주의적 초자아로 작동한다. “즐겨라! 이 브랜드가 주는 완벽함을.” 그러나 그 완벽함은 환상이다.
브랜드의 역할
브랜드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심장이 되는 것이다. 공동체의 틈과 모순을 함께 드러내고, 그 속에서 공감을 만들어 내는 일. 결핍을 은폐하지 않고, 오히려 결핍을 매개로 연결하는 일. 완벽한 이미지가 아니라 상처와 균열 속에서 신뢰를 얻는 것. 브랜드가 심장이 될 때, 그것은 공동체와 함께 뛸 수 있다.
스미스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과제는 지금도 남아 있다. 경제와 윤리, 신학이 서로 결합하면서도 서로의 균열을 드러내는 구조. 브랜드 역시 마찬가지다. 초월적 해결사처럼 군림하기보다, 불완전함 속에서 살아 있는 심장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공동체와 함께 의미를 만들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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