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멘트컴퍼니] 클립토크: 디자인가이드 1편
- lmnt

- 9월 25일
- 6분 분량
아무리 훌륭한 브랜드 전략과 아이덴티티를 개발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의 모든 접점에서 일관되게 구현되지 않으면 의미가 감소된다. 브랜드 디자인가이드는 바로 이 '일관성'을 담보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수많은 기업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디자인가이드를 제작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름답게 만들어진 가이드북이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거나, 형식적으로만 참조되다가 결국 브랜드 일관성은 무너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상의 원인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가이드가 '만들기'에만 집중할 뿐 '사용되기'는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제작자의 관점에서는 완벽해 보이는 가이드가, 정작 사용자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장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브랜드 디자인가이드가 '작동'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런 질문으로 엘레멘트컴퍼니는 클립토크: 디자인가이드 편을 기획했다. 이번 토크는 단순히 '예쁜 가이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서 작동하는 가이드'를 만들기 위해 알아야 할 4가지 실무 포인트를 다룬다.
누구에게는 당연하지만, 당연하기에 잊고 있었던 기본적인 관점들을 소개한다. "이 정도는 알고 작성하자"라는 마음으로, 이론이 아닌 현장의 목소리를 담고자 한다.
4가지 실무 포인트:
1편: 디자이너 관점을 벗어나자 -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2편: 정보 디자인이 핵심이다 - 보기 좋은 가이드가 읽기도 좋다
3편: 책상을 벗어나 현장으로 - 현장을 이해하고 시뮬레이션으로 소통하기
4편: 완성도가 신뢰를 만든다 - 디테일이 전체를 좌우한다

1편: 디자이너 관점을 벗어나자
디자인가이드 제작에서 가장 흔한 함정은 무엇일까? 바로 제작자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한 디자이너는 모든 맥락을 알고 있다. 왜 이런 컬러를 선택했는지, 이 타이포그래피가 브랜드 철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각 디자인 요소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두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풍부한 배경지식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도 당연히 알 것이라고 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문용어로 가득한, 맥락 없는 규칙들만 나열된 가이드가 탄생한다.
디자인가이드를 둘러싼 현실
실제 현장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디자이너가 계속 그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이직이나 부서 이동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가이드를 활용해야 할 수도 있다. 더 자주 발생하는 상황은 전혀 다른 팀에서 가이드를 참조해야 하는 경우다. 마케팅팀이 급하게 SNS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거나, 외부 제작업체에 광고물 제작을 의뢰할 때 가이드를 넘겨주어야 한다.
특히 기억해야 할 점은 시간의 흐름이다. 1-2년이 흐른 후에 클라이언트 측에서 갑자기 가이드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거나 세부 사항에 대해 질문하는 경우도 있었다. 더욱 곤란한 상황은 당시 가이드 개발을 담당했던 디자이너나 기획자가 퇴사했을 때다. 이때 가이드가 자명하지 않다면, 프로젝트 히스토리를 다시 찾아가며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 생긴다.
이 모든 상황에서 가이드는 홀로 서 있어야 한다. 제작자의 추가 설명 없이도 스스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브랜드 디자인 가이드를 처음 접하는 사람의 마음은 복잡한 미로를 처음 마주한 사람과 같다. 길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단순해 보이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조차 막막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이 가이드를 보는 사람이 과연 나와 같은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을까?”
맥락부터 제공하라: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주기
여기서 핵심은 순서다. 세부 규정을 나열하기 전에, 먼저 '맥락'을 제공해야 한다.
브랜드 가이드는 단순한 사용 설명서가 아니다. 그것은 브랜드의 세계관을 번역하는 일종의 '해석서'다. 따라서 사용자가 이 번역 작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충분한 배경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우리가 누구인가 부터 시작해야 한다. 브랜드의 본질과 철학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세부적인 디자인 규정만 보게 되면, 그것은 단순한 규칙의 나열에 불과하다. 하지만 "왜 이런 디자인을 해야 하는가?"라는 배경을 먼저 이해하게 되면, 이후의 모든 가이드라인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보인다.

가이드에서 브랜드 가치 플랫폼을 먼저 보여주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브랜드 가치 플랫폼이란 쉽게 말해 '이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와 철학'을 정리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브랜드라는 무형의 개념을 유형의 디자인 요소로 번역하는 '로제타 스톤' 역할을 한다.
우리가 나무증권의 '사람 중심 투자증권 앱'이라는 철학을 먼저 이해한다면, 'NAMUH'라는 브랜드 네임이 'Human'을 뒤집은 애너그램(Anagram)이라 설명이 더욱 깊이 와닿는 것처럼 말이다(엘레멘트컴퍼니는 '나무'라는 한글 이름의 스펠링을 NAMUH라고 표기했다. 이 철자는 NH를 앞뒤로 숨겨 기업의 역사까지도 품고 있는 겸손하지만 창의적인 기표[Signifiant]다).

"[엘레멘트컴퍼니] '나무증권공항'이 MZ세대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편 참조 (9월 2일)
접근성의 진짜 의미: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브랜드 만들기
맥락을 제공했다면, 이제 그 맥락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접근성의 문제가 등장한다.
브랜드 가이드의 접근성은 단순한 편의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브랜드 생태계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다. 소수의 전문가만이 브랜드를 다룰 수 있다면, 그 브랜드는 결국 일관성을 잃게 된다.
어렵게 만든다고 전문가다운 것은 아니다. 복잡한 전문용어와 난해한 설명은 가이드를 따르지 않게 만드는 주범이다. 브랜드 디자인 가이드는 본질적으로 모든 사용자를 위한 도구로, 쉽고 일관되게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쉽다'는 것은 단순히 글을 쉽게 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로고 사용법을 설명할 때도, 컬러 시스템을 정리할 때도, 적용 예시를 보여줄 때도 모두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구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규칙을 제시할 때는 그 규칙이 왜 필요한지도 함께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쉽다고 해서 격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가이드는 브랜드의 공식 문서이기 때문에 일정 수준의 전문성과 신뢰성을 유지해야 한다. 친절하고 명확하게, 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톤앤매너로 전달해야 한다.

실제로 가이드를 검수하다 보면 무의식중에 구어체로 작성된 부분들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변형을 강하게 해서 가독성이 낮아지는 경우", "다른 모티프랑 함께 구성하는 경우"와 같은 표현은 구어체다. 구어체는 독자로 하여금 호불호를 갖게 하며, 에세이, 소설, 시 장르에 어울리는 문체다. 가급적 문장의 의미에만 객관적 태도로 집중하게 할 때는 지양대상이다. 전체 문서의 톤을 맞춰보면 이런 미묘한 차이들이 눈에 띈다.
이는 디자이너의 전문성을 의심하게 한다. 문어체로 작성하자.
사용자 맥락의 이해: 그들의 언어로 말하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쉽게' 만들 수 있을까? 핵심은 사용자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다.
브랜드 가이드는 진공상태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조직 문화, 업무 환경, 커뮤니케이션 방식 속에서 기능한다. 따라서 그 맥락을 파악하고 반영해야 한다.
쉽게 만든다는 것은 사용자에게 익숙한 방식을 활용하는 것이다. 클라이언트 조직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용어나 표현 방식을 최대한 활용할수록 가이드의 수용도는 높아진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 이해를 추구하는 방식이다. 중요한 건 공통의 감각(Common Sense)이다.
하지만 단순히 기존 용어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조직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같은 '고객'이라는 단어라도 IT 회사와 제조업체에서는 다른 뉘앙스를 갖는다. 금융회사에서 '상품'이라고 부르는 것을 브랜딩 회사에서는 '서비스'라고 부를 수 있다. 브랜드 가이드는 이런 미묘한 차이까지 포착해야 한다.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마케터, 기획자, 심지어 CEO까지도 쉽게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브랜드 일관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설명을 쉽게 하는 문제가 아니라, 브랜드의 본질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이다.
변화와 일관성의 균형: 새로운 브랜드 언어 정착시키기
그런데 여기서 미묘한 역설이 하나 생긴다. 기존 맥락에 맞춰야 한다면서, 동시에 새로운 브랜드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브랜드 경험을 설계했다면, 언어 경험도 바뀌어야 한다.
최근 엘레멘트컴퍼니가 진행한 LG유플러스 리브랜딩 프로젝트에서 이런 원칙을 실제로 적용한 바 있다.
고객사는 'Simply.U+ / 당신의 일상을 심플하게'라는 슬로건을 도입했는데, 이 새로운 브랜드 철학을 도입하면서, 브랜드 가이드 전반의 언어도 함께 바꿔야 했다. 과연 심플하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심플한 언어는 어떠해야 하는지 부가적인 논의가 필요했다.
실제로 브랜드 가이드에서 MMS 메시지 작성 방법을 안내하는 부분을 보면 이런 변화가 잘 드러난다.

기존에는 "티빙 계정 재등록 안내"라는 제목 아래 "계정을 다시 연결해주세요"라는 형태였다. 전형적인 서비스 제공자 관점의 언어였다. 하지만 새로운 방향성에 맞게 "티빙 계정을 다시 연결해주세요!"라는 직접적이고 친근한 표현으로 가이드라인에 새롭게 반영했다.
단순해 보이는 변화지만, 그 이면에는 중요한 관점의 전환이 있다. 기존에는 "재등록 안내"라는 서비스 절차 중심의 언어였다면, 새로운 가이드는 고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방식이다. '안내'에서 '요청'으로, '절차'에서 '관계'로 언어의 성격이 바뀐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표현 수정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언어는 생각을 규정한다. '서비스 안내'와 '고객 소통'은 서로 다른 관점을 전제하고, 다른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요구한다. 브랜드 철학이 바뀌면 가이드의 모든 언어도 그에 맞춰 일관되게 전환되어야 한다. 언어까지 함께 설계해야 브랜드의 변화가 고객에게 확실히 전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변화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는 것이다. 왜 기존 용어에서 새로운 용어로 바뀌었는지, 이 변화가 브랜드 경험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가이드에서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물론 가이드에 모든 배경 설명을 담을 필요는 없지만, 클라이언트와 이 부분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이 충분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관점을 이해하고 이후 작업에서도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다.
일관성의 힘: 하나의 목소리로 말하기
이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게 작동하려면 마지막으로 일관성(Consistency)이 필요하다.
일관성은 브랜드 아이덴티티(Identity)의 존재 조건이다. 브랜드는 아무리 다른 접점에서 경험하더라도 동일한 수준의 정체성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는 비즈니스의 안정감과 신뢰도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이러한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형식적 조건으로서 브랜드 가이드가 필요한 것이다. 때론 형식이 내용의 균일성을 결정한다.
이를 위해 표현을 통일하는 것이 좋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각 섹션마다 다른 사람이 작성한 것처럼 느껴진다면 사용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건 문체 어미를 정돈하는 것이다. '합니다', '한다', '해요'등의 어미가 섞이는 건 좋지 않다. 하나의 문체를 정하고 끝까지 유지하는 편이 낫다. 또한 같은 의미의 문장이라면 동일하게 반복적으로 사용해야한다.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어떤 가이드에서는 첫 페이지에서 '유관부서'라고 썼다가, 중간에는 '주관부서', 마지막에는 '해당부서'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면? 모두 같은 부서를 지칭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이런 식으로 용어가 일관되지 않으면 사용자는 "이게 같은 부서를 말하는 건가? 다른 부서인가?" 하며 혼동할 수밖에 없다.
비즈니스에서 신뢰는 일관성으로 판단된다. 작은 것도 일관성이 없는 기업의 브랜드를 누가 신뢰할까? 디자인 가이드는 브랜드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결국, 실무에서 작동하는 디자인가이드인가?
브랜드 디자인가이드를 만들 때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것을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이 봐도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의 핵심은 단순하다. 가이드가 실제 업무 현장에서 제대로 활용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완벽한 가이드라도 사용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맥락을 제공하고, 접근성을 높이고, 사용자를 이해하고, 변화를 설명하고,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모든 노력은 결국 현장을 향한다. 브랜드 디자인가이드가 서랍 속에서 잠들지 않고, 실제 현장에서 매일 참조되는 살아있는 문서가 되는 것. 그것이 브랜드 디자인가이드의 목표다.
이 질문에 확신 있게 "그렇다"라고 답하는 건 정말 녹록치 않다. 세상에 완벽한 가이드가 존재할까?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완벽함에 다가서려고 노력할 뿐. 그런 목적의식을 지니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디자인 가이드야말로 브랜드 일관성, 나아가 비즈니스의 신뢰라는 궁극의 목표 달성에 기여할 것이라 생각한다.
2편: 정보 디자인이 핵심이다 - 보기 좋은 가이드가 읽기도 좋다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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